아이가 말을 배우는 과정을 지켜본다.
아이가 좋아하는 코끼리 인형. 처음에 인형은 이름 없이 지냈다. 사실 이름이 필요 없었지. 부를 일이 없었으므로. 아이는 거의 누워만 지냈기 때문에 코끼리인형 역시 언제나 아이와 함께였다.
걷기 시작하자 아이와 인형이 서서히 분리됐다. 아이는 인형이 사라지면 찾았다. 그제야 아이는 인형을 어떻게든 불러야 했다. “으으으응”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아이가 찾을만한, 아이의 소중한 것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므로 우리는 그 소리만 듣고도 코끼리 인형을 찾는다는 걸 알았다.
아이에게 코끼리 소리를 들려주었다. 네가 좋아하는 코끼리는 이런 소리를 낸단다. 긴 코를 들어 올리며 “뿌우” 소리를 내. 아이는 유심히 들었다. 이런 소리가 나는 구나. 그렇구나.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인형 더러 “뽀”라고 불렀다. 인형이 없어지면 “뽀, 뽀” 하며 찾기 시작한 것이다. 인형에게 이름이 생겼다.
우리는 “뽀”라는 단어 아래에서 조금 따뜻해졌다. 서로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인형을 찾는 아이에게 뽀를 안겨주었을 때 볼 수 있었던 그 표정 아래에서 나는 뭉근하게 행복했다. 네가 안고 있는 게 인형이 아니라 마치 세계라는 듯. 거대한 안정이라는 듯.
시간이 지나자 아이의 세계에 엄마와 아빠 말고 다른 사람들이 출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뽀”가 무엇인지 몰랐다. 나는 아이와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뽀”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일을 했다. 아이와 다른 이들이 쉽게 연결될 수 있도록. 그러나 코끼리를 언제까지 “뽀”라고 부를 수는 없다. 나의 안내는 영원할 수 없으므로. 아이가 직접 세계를 걸어 다녀야 하니까.
그리하여 나는 아이에게 “뽀”의 원래 이름을 알려 준다. 나와 아빠 말고도 더 많은 사람과 약속할 수 있는 단어. “코끼리”
나는 아이가 이해할 거라고 믿으며 설명한다. 어렵고, 복잡한 것이라도. 기억할 것과 아직은 잊어도 좋을 것을 구분하는 것은 아이의 몫. 스스로 선택할 것이라 믿는다. “뽀”라고 부르는 것 이외에 다른 이름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이름에 대해 다들 알고 있다는 것을 아이는 낯설지만 재미있어했다.
아이는 뽀라고 부른다. 그러나 내가 인형을 가리키며 이름이 뭐지? 라고 물어보면 “코꼬리”라고 말했다. 뽀는 코꼬리고, 코꼬리는 뽀였다. 아이는 이해한 듯하다.
으으응에서 뽀, 뽀에서 코꼬리가 되는 동안 아이는 앉아있다가 걸었고 뛸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아이는 "코꼬리"가 보이지 않으면 자신의 침대로 뛰어간다. 스스로 인형을 찾으러 간다. 보이지 않아도 있을 거라 믿으며. 늘 있던 그곳을 기억하니까.
아이가 “코꼬리”라고 말하는 그 발음이 좋았다. 처음 듣는 팝송을 내 맘대로 따라 부를 때처럼, 아이의 귀에 들리는 나의 목소리가 “코꼬리”라고 출력되는 걸 확인하는 게 좋았다. 그러나 아이는 이제 제자리에서 폴짝 뛸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더 이상 “코꼬리”라고 발음하지 않는다. 열 번 중 여덟 번은 코끼리라고 말할 수 있다.
아이가 코끼리라고 완벽하게 발음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아이는 1년에 한 번도 코끼리를 말할 일이 없을 것이다. 다 큰 아이에게 동물은 더 이상 재미있는 친구가 아닐 테니까. 심지어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그 인형도 찾지 않겠지. 아이의 발음이 완벽해질수록 그 대상과 점점 멀어진다는 건 조금 쓸쓸한 일이다.
아이의 세계와 언어와 행동이 정교해진다. 그 정교함의 8할은 아이 자신의 성취라는 것을 알기에 경이롭지만, 동시에 나는 못내 아쉽다. 너의 서툰 발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 나였던 덕분에 우리 사이에는 많은 비밀이 있었다.
아이는 이제 이렇게 말하게 될 거다.
“이게 코끼리라고? 코가 너무 짧은데?”
“상관없었지. 네가 좋아하던 건 코가 아니라 귀였으니까.”
나는 이 말을 준비해 둘 것이다.
2023년 1월 17일 화요일
행복편지 지기
박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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